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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내가 즐겨 찾는 동해안의 아름다운 열 곳.

einne 2007. 6. 22. 13:09

 

동해안 정자 기행을 하면서 내 나름대로 동해안의 아름다운 곳을 꼽아보니 상당수가 있다. 일일이 다 열거를 하자면 한이 없을 것 같아, 고민 고민 하다가 그 중에서 마음에 와 닿는 열 곳을 선정했다. 사람들의 주관은 다 다르기 때문에 어느 누구는 ‘이곳이 더 좋다’라고도 이야기 하겠지만, 나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아래 열 곳의 아름다운 곳을 정했다. 물론 이 열 곳의 아름다운 곳은 여름뿐만 아니라, 사철 그 운치를 더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 절경을 찾아 여행을 떠나보자.

 

 

1) 청간정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청간리에 소재한 청간정은 관동8경중 하나요, 설악일출 8경의 하나로 유명하다. 청간정은 본래 청간역의 정자였다고 하나, 그 창건연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조선시대 중종15년(1520)에 간성군수 최청(崔淸)이 중수한 기록이 있어 정자의 건립은 그 이전으로 추정된다. 이후 현종 3년(1662)에 최태계가 중수하였으며, 거의 같은 시기에 당시 좌상 송시열(宋時烈)이 금강산에 머물다가 이곳에 들려 친필로 '청간정(淸澗亭)'이란 현판을 걸었다.


청간정에 올라 동해바다를 바라다보면 ‘쪽빛 바다’라고 했던가? 그 물색이 거의 환상적이라고 표현을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겨울이면 바닷가를 무리지어 나르는 철새들의 장관을 볼 수 있고, 여름이 되면 청간정 주변에 널린 산죽 숲을 들어가면 밖의 기온과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한 여름 그 산죽 안에는 늦가을의 기온을 만끽 할 수가 있다.

 

   

2) 하조대

양양군 현북면에 있는 경승지인 하조대는 그 일대가 암석해안으로 이루어져 있다. 온갖 기암괴석과 바위섬들로 이루어져 주위의 울창한 송림과 어울려 절경을 이루고 있는데, 동해안에서 가장 넓은 은설(銀雪)의 백사장을 자랑하는 곳이다. 옛 부터 ‘산은 설악이요, 바다는 하조대라.’하여 영동지방의 명승지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하조대(河趙臺)는 KBS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로 유명해진 조선의 개국공신 하륜, 조준 두 충신이 고려 말엽 이곳에서 잠시 은거하였다하여 두 사람의 성을 따서 붙여진 명칭이라고 전한다. 하조대는 조선 정종 때 정자를 세웠으나 철폐되었으며, 수차례의 중수를 거쳐 1940년 8각 정을 지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던 것을 1955년과 1968년에 각각 재건하였고, 현재의 건물은 1998년 해체·복원한 건물이다. 하조대에서 바라다보는 동해는 아름답다 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하조대 등대에서 눈을 돌려 멀리 강릉방향의 바닷물은 시원하다 못해 차갑게 느껴진다. 암벽을 치며 철석거리는 바닷물은 아름다운 음률과 같다. 

 

 

3) 호미곶

포항시 대보면 대보리에는 호랑이 꼬리라는 호미곶이 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호미곶은 호랑이의 꼬리라 하여, 한반도의 정기가 서려있는 곳이다. 조선 명종 때 풍수지리학자인 남사고선생은 『산수비경(山水秘境)』에서 한반도는 백두산 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는 형상으로, 백두산은 호랑이 코이며, 호미곶(虎尾串)은 호랑이 꼬리에 해당한다고 기술하면서 천하의 명당이라 하였다. 영일만의 끝부분(포항에서 38㎞)인 호미곶 앞바다는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해역으로 각종 물고기의 회유지이다.


호미곶은 유명한 관광지요 해맞이 장소로 명성을 얻고 있다. 2004년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뜬 곳으로 기록이 되고 있다. 호미곶 광장에는 기념조형물(상생의 손), 성화대, 영원의 불씨함, 채화기 (천년의 눈동자), 캐릭터상품특판장, 공연장, 주차장, 관리소 등이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한편에는 2004년 1월 1일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뜬 것을 기념하기 위해 2만 명분의 떡국을 끓이려고 준비한 거대한 가마솥이 있어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바닷물 속에 잠겨있는 상생의 손, 그리고 아름다운 등대. 드넓은 광장과 조형물 등. 언제나 새로운 것에 대한 눈을 뜨게 해주는 곳이다.

 

 

4) 방어진

울산 방어진에 가면 대왕암이라고 하는 곳이 있다. 이곳을 가면 안내판에


「삼국통일을 이룩했던 신라 30대 문무왕은 평시에 지의법사에게 말하기를 “나는 죽은 후에 호국대룡이 되어 불법을 숭상하고 나라를 수호하려고 한다.” 하였다. 대왕이 재위 21년 만에 승하하자 그의 유언에 따라 동해구의 대왕암에 장사를 지내니, 마침내 용으로 승화하여 동해를 지키게 되었다. 이렇게 장사지낸 동해의 해중릉을 대왕바위라 하며 그 준말이 ‘댕바위’로 경주시 양북면에 있다.


대왕이 돌아가신 후에 그의 왕비도 세상을 떠난 후에 용이 되었다. 문무왕은 죽어서도 호국의 대룡이 되어 그의 넋은 쉬지 않고 바다를 지키거늘 왕비 또한 무심할 수가 없었다. 왕비의 넋도 한 마리의 큰 호국룡이 되어 하늘을 날아 울산을 향하여 동해의 한 대암 밑으로 잠겨 용신이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사람들은 이곳을 지금의 대왕바위라 불렀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말이 줄어 댕바위(대왕암)라 하였으며, 또 용이 잠겼다는 바위 밑에는 해초가 자라지 않는다고 전해오고 있다.(울산광역시 동구청장) 」 라고 적혀있다.


대왕암을 들어가는 길은 아름다운 숲이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나면 폐부 깊숙이 신선한 공기가 가득 차 옴을 느낀다. 대왕암을 찾아가다가 처음 만나는 것은 구 등대다. 등록문화재 제 106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울기등대 구 등탑과 현재 사용하는 등대가 나란히 서 있다. 울기등대는 1905년 2월 처음으로 세울 때는 목재였다고 한다. 이 목재등대를 1906년 지금 있는 자리에 철근과 콘크리트로 다시 세워 1987년 12월까지 80여년을 사용하였다고 하니 등대의 모습이 세삼 대단해 보인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배들이 항으로 안전하게 귀항을 하도록 유도를 했을 것인가? 새삼 등대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등대를 지나 밑으로 내려가면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반긴다. 자연의 아름다움이란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관람을 할 수 있도록 철근으로 길을 만들어 놓은 것이 오히려 부담스럽다. 바위 끄트머리에 올라서면 바로 밑에 바닷물이 철썩이는 것이 정겹다.

 

 
5) 해가사 터

동해시에서 삼척을 향해 7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삼척MBC가 보인다. 이곳을 지나 증산해수욕장과 수로부인공원이라는 이정표를 따라가면 고가도로 밑을 통과해 좌회전을 하게 된다. 고개를 하나 넘으면 시원한 동해바다가 펼쳐지고, 멀리 촛대처럼 생긴 추암이 바라다 보인다. 이곳을 구지가가 창출된 해가사 터라고 생각하고 있다. 수로부인과 용왕의 이야기가 전하는 해가사 터. 수로부인의 미모가 얼마나 출중했으면 가는 곳마다 신물(神物)들이 나타나 수로부인을 취하려 했을까? 


깨끗하게 지어 놓은 아담한 임해정에 올라 동해를 바라다보니, 마침 바람이 부는 날이라서 동해의 작은 파도들이 앞 다투어 밀려든다. 백사장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갈매기 떼들은 한 곳을 바라보며 파도가 밀려들어도 요동도 하지 않고 있다. 삼척지방에 전하는 해가사는


구호구호출수로(龜乎龜乎出水路)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어라.
약인부녀죄하극(掠人婦女罪何極) 남의 아내를 앗은 죄 얼마나 크냐.
여약패역불출헌(汝若悖逆不出憲) 네 만약 어기어 내 놓지 않으면
입망포략번지끽(入網捕掠燔之喫) 그물을 넣어 잡아 구워 먹으리.

라고 되어있다. 아름다운 일출 장소로 유명한 이곳 해가사 터와 멀리 바라다 보이는 촛대바위. 동해안의 절경 중에서 둘째가라면 서운한 곳이기도 하다.

 

 

6) 해신당

7번 국도를 따라 남하하는데 길이 좋다. 요즈음은 어디를 가도 길이 좋아서 고속국도와 지방국도를 적당히 이용을 하면 생각 밖으로 빠른 길을 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왕 늦어진 길이니 국도를 따라가면서 동해의 풍광에 젖어보리라 마음을 먹고 구 길로 접어들었다. 삼척 바닷가에 보상이 되어 있는 해신당 성 민속공원. 다양한 성문화를 볼 수 있는 이곳은, 바다에 나가 불귀의 객이 된 처녀가 해신(海神)이 되어 모셔져 있는 곳이다.


해신당 성 민속공원은 들어가는 입구가 얼마 전인가 강원도에 큰 산불이 났을 때 모두 소실이 되었지만, 해신당 주변은 아직도 노송이 숲을 이루고 있다. 해신당을 들어가면 각국의 성을 상징하는 민속조형물과 전시관 안에 마련된 성에 대한 각종 전시물 등, 볼 것이 많아 자주 찾는 곳이다. 송림 숲을 지나 가파른 바위 위에 지은 해신당을 가면 바닷물의 일렁임이 예사롭지가 않다. 늘 이곳을 들리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그 일렁이는 파도가 해신이 된 처녀의 마음과 같아 보여, 가슴이 저린 곳이다.

 

 

7) 하슬라

강릉에서 7번 국도를 따라 정동진을 향해 가면 좌측 바닷가 쪽에 통일공원 함정전시관과 우측에 통일안보 전시관이 나온다. 그 곳을 조금 지나치면 등명락가사가 보이고 얼마가지 않아 굽이도는 길을 안고 동해바다를 굽어보는 산 위에 하슬라 아트월드가 있다. 하슬라 아트월드는 자연 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비탈면과 산의 높이를 그대로 이용하여 손으로 직접 만들었으며, 자연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각도로 길을 내고 예술정원을 꾸몄다.


인위적인 가공보다는 주어져 있는 자연환경을 최대한 이용하는 방식으로 꾸몄으며 소나무 정원, 시간의 광장, 습지 정원, 논밭 정원, 바다의 정원, 놀이정원 등으로 구분되어 진다. 논밭정원은 존재하던 50년 전의 논을 재현하였고, 습지정원은 원래부터 있던 습지를 그대로 살려 자생하는 식물들을 이용한 정원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인간, 예술, 환경이 함께 공존하는 정원이 되도록 조성하였다. 예술이 있는 장소라기보다는 하슬라 아트월드 대지 전체가 예술이다. 그 안에 생명을 움트는 많은 식물들과 동물, 곤충, 그리고 인간이 하나가 되어 함께 숨을 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슬라 아트월드에서 동해바다를 바라다보는 경관이야 말로 일품이다. 조금 더 지나 정동진이야 말로 일출을 보는 장소로는 전국 최고라도 이야기하지만, 이곳 하슬라에서 바라다보는 일출 또한 만만치 않다. 더욱 갖가지 조형물들과 함께 숨 쉬는 자연은 그야말로 별천지를 찾아든 기분까지 느낀다.

 

 
8) 망양정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인 울진군 근남면 삼포리 바닷가에 서 있는 망양정(望洋亭)은 그 위치가 고려 때에는 기성면 망양리 해변언덕에 세워져 있었으나, 조선 세종 때 채신보가 이곳의 망양정이 오래되고 낡았다하여 망양리 현종산 기슭으로 옮겼다 한다. 그 후 1517년 폭풍우로 넘어진 것을 1518년(중종 13)에 안렴사 윤희인이 평해군수 김세우에게 부탁하여 중수하였고, 1860년(철종 11)에 울진현령 이희호(李熙虎)가 군승(郡承) 임학영(林鶴英)과 더불어 현 위치인 근남면 산포리 둔산동(屯山洞)으로 이건하였다 한다.


망양정은 성류굴 앞으로 흘러내리는 왕피천을 끼고 동해의 만경창파를 한눈에 굽어 볼 수 있는 언덕에 세워져 있으며, 그 경치가 관동팔경 중에서 제일가는 곳이라 하여 숙종이 <관동제일루>라는 친필의 편액을 하사하였다. 관동별곡을 지은 송강 정철은 망양정을 이렇게 읊었다.


망양정 오른 말이 바다 밖은 하늘이니 하늘 밖은 무엇인고. 가뜩 노한 고래 뉘라서 놀래관대 불거니 뿜거니 어지러히 구는지고. 은산(銀山)을 꺾어내어 육합(六合)에 나리는 듯 오월장천(五月長天)에 백설은 무삼일고. 져근덧 밤이들어 풍랑이 정하거늘 부상지척(扶桑咫尺)에 명월을 기다리니 서광천장(瑞光千丈)이 뵈는 듯 숨는고야. 주렴을 고쳐걸고 옥계를 다시쓸며 계명성(啓明星)돋도록 고초 앉아 바라보니 백련화 한 가지를 뉘라서 보내신고. 이 좋은 세계 남대되 다 뵈고져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 것인가. 장소는 옮겨졌다고 하나, 망양정의 풍취는 아직도 그대로인 것을.

 

 

9) 경포대

경포대에 오르면 다섯 개의 달이 보인다고 한다.

하나는 하늘의 달이요,
둘은 호수의 달이요,
셋은 바다의 달이요,
넷은 술잔의 달이요,
다섯은 님의 눈에 비친 달
이란다.


강릉에서 북동쪽으로 6km 정도를 가면 해안모래와 만나는 곳에 민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석호인 경포호가 있고, 호반 서쪽 언덕 위에 유명한 경포대가 있다. 경포호는 옛 부터 시인묵객들이 예찬한 곳으로 호수가 거울처럼 맑다고 하여 일명 경호(鏡湖), 군자호(君子湖)라고 도 부른다. 정철의 『관동별곡(關東別曲)』에 소개되는 이 호수는 바다에서 장엄하게 떠오르는 아침 해와 붉게 물드는 석양, 야경으로 보는 호수경치, 짙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한 백사청송(白沙靑松)과 해당화가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절경을 연출하고 있다고 하니 그 누구라도 이곳에 오르면 시한 수 읊조리지 않으리오. 


경포대(鏡浦臺)는 고려 충숙왕 13년(1326년)에 강원도의 한 관리였던 박숙정이 당시의 인월사 옛터에 세웠던 것을, 조선 중종 3년 (1508년) 강릉부사 한급이 지금의 자리에 옮겨놓았다, 그 후 여러 차례의 중수 끝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경포대 내부에는 숙종의 어제시와 율곡이 10세에 지었다는 경포대부를 비롯해, 조하망의 상량문 등 수많은 명사와 시인묵객의 글이 게시돼 있다. 호수를 바라보는 쪽 누대의 단은 한 단 더 높여 놓았는데 이는 방문객들이 주변의 경치를 더 잘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일 것으로 보인다.


경포대는 여름철 해수욕장뿐만 아니라, 한겨울에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바다도 바다려니와, 경포호 주변에 있는 많은 정자들과 노송 숲, 그리고 푸른 바다가 어우러져 신선이 된 듯한 감흥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10)의상대

의상대는 낙산사로 들어가 해수관음을 우측에 두고 보타전 길로 들어가면 동해를 바라다보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바람 부는 날 의상대에 오르면 시원한 동해의 푸른 물이 발아래 펼쳐지고, 암벽에 부딪쳐 흰 포말을 내며 부서지는 동해의 물은 포효하는 한 마리 범의 소리인 듯 거칠다. 


의상대(義?臺)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낙산사를 지은 의상대사를 기념하기 위해 1925년에 만든 정자이다. 원래 이곳은 의상대사가 낙산사를 창건할 당시 머무르면서 참선을 하였던 곳이라고 하여 정자가 없을 때부터 불린 이름이다. 1936년 폭풍으로 도괴가 되었던 것을 1937년에 재건하였고, 1975년에 중수를 하였다. 6각으로 만들어진 아담한 크기의 의상대는 낙산사에서 홍련암으로 가는 길 해안 언덕에 있어 좋은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다. 의상대의 난간은 비스듬하게 세운 것이 특징이다.


의상대 곁에 큰 키를 자랑하는 노송 서너 그루가 뛰어난 풍광을 연출한다. 오랜 시간 암벽 위에서 참선을 하여 깨달음을 얻은 의상대사의 마음을 아는지, 철새 한 무리가 하늘을 나는 것이 도솔천을 오르려는 마음 같아 보인다.


동해안. 아름다운 경치와 맑은 바닷물. 그리고 그곳을 즐겨 찾는 사람들. 이 모든 것이 함께 어우러진 곳. 동해안에는 절경이라고 하지 않을 곳이 없다. 가는 곳마다 명승이요, 찾는 곳마다 장관이라. 오죽하면 관동팔경이라 해서 송강 정철선생은 『관동별곡』을 노래하였을까? 너무 많은 절경에서 이 열 곳을 찾는데 만도 며칠이 걸렸다. 이후 또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보다 못하지 않은 제2의 절경을 찾아보리라 마음을 먹는다.

출처 : 누리의 취재노트
글쓴이 : 온누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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